발표수업

추웠던 날씨가 풀렸다. 특별할 것 없는 날들이 지나가고 있다. 나는 이사온 뒤로 내가 외로웠던 이유가 텔레비전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건 바로 냉장고 때문이었다. 냉장고가 너무 작았다. 냉장고가 조금만 크다면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안정적인 마음가짐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중고 냉장고를 보러 갔지만 비쌌다. 뒤돌아 나오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사야 할 것 같다. 냉장고만 든든하게 채워진다면, 더는 불안해 하거나 그래서 외로워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국가론 수업 시간에 발표를 들었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이런 발표를 접하게 되리라곤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개막장이었다. 학생들의 수업 발표인지 공안 검찰의 수사 결과 발표인지 듣는 내내 헷갈렸다. 촛불시위와 용산참사와 미디어법을 둘러싼 논란이 386 세대가 진지전을 수행한다는 증거란다. 거기에 덧붙여 노무현 정부의 부동산 안정 대책과 사립학교법 개정도 386 진지전의 근거로 제시했다. 그래서 결론은? 아직도 386 세대들은 진지전을 수행하고 있다. 라는 것이다. 어이가 없다. 그럼 이명박 정부의 외고 폐지도 진지전의 일환인가? 한나라당으로 잠입한 386 프락치들의 소행인가? 민주주의 정치 일반에 혼재되어 있는 포퓰리즘과 진지전을 구별하지 못한다. 그보다 앞서 진지전과 기동전이라는 개념은 어디까지나 혁명을 전제로 하는 개념인데 자본주의 체제와의 대결 전선과 일개 정부와의 대결 전선 또한 구별하지 못한다. 학생들은 그렇다고 치자. 발표가 끝나고 나서 촛불 시위는 '진지전'이 아니라 '기동전'에 가깝다고 발표를 '교정'해주신 교수님은 또 뭔가. 통합공무원노조의 강령이 주사파의 강령과 비슷하다면서 이 또한 386 진지전의 근거로 들고, 통합공무원노조의 집행부 중 한 명이 삼민투위 활동을 했다는 것을 보충 근거로 들었다. 이런 수준 이하의 발표를 듣고 졸업하게 되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었다. 경악에 경악에 경악을 거듭했다. 난 이것을 학생들의 수준이 떨어진 증거라고 보지 않는다. 다만 소양이 거세된 것이라고 본다. 학술적 용어를 정의하지 않고도 발표를 진행하고 보고서를 써내는 학술적 나태함과 그 나태함조차 문제로 여기지 않는 태도의 안이함이 문제다. 그리고 그러한 태도를 교정해 줄 시스템이 없는 대학도 문제다. 예컨데 지금 듣는 국문과 수업에서는 수업 초반부에 '표절'에 대한 글들을 읽으며 보고서 한 편을 쓰더라도 엄청나게 엄밀하고 정밀한 과정을 거쳐 써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발표 수업일 때도 정확하지 않은 개념이나 애매한 부분이 있으면 가차없는 비판과 수정이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국문과 수업 시간에 나눠준 글쓰기 가이드라인에는 '우리 사회'나 '흥미롭다' 와 같은 말은 사용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그 말이 실질적으로 가르키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외과 발표에서는 진지전이나 기동전, 유기적 지식인과 계급 투쟁과 같은 엄밀히 사용해야 할 사회과학적 용어들에 대한 네이버 사전적 정의만으로 발표를 진행해도 별 탈이 없다. 이래서 대학이 학생을 키워내는 소명을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정외과의 수업엔 그런 게 없다. 과제물을 돌려받는 경우도 없으며 발표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어떠한 비판적인 코멘트도 없다. 단지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해서 학우들의 이목을 집중시킬까 하는 쇼맨쉽밖에 남은 게 없다. 학부시절 동안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입장에서 이런 말 하는 것도 웃기긴 하다. 웃기다 참.

by  깨  | 2009/11/05 22:10 | 깨's Story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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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creep23 at 2009/11/06 08:33
1.'우리 사회'는 '한국 사회'로 쓰는 게 맞는 거지. 그건 실질적으로 가르키는 게 없어서라기보다, 불특정 독자가 '우리'(자기와 어떻게든 관계가 있다는 의미)인지 아닌지 모르기 때문이지. 하지만 한국 언론에서는 외국과의 대조를 부각시킬 때는 일부러 고유명사처럼 '우리사회'(띄어쓰기 하지 않음)를 쓰기도 한다. 이건 크게 잘못됐다고 하긴 어렵다고 본다. 뉴욕타임즈 같은 곳이 기사에 'our society' 또는 'our America'(대통령이 연설할 때 간혹 사용)라고 쓰는 건 보지 못했지만.
2.'흥미롭다' 자주 쓰는 건 영어 논문 읽다가 생긴 버릇이 아닐까 싶다. 경제경영 논문에서 뭐든 강조할 만하다 싶으면 'interesting' 갖다 붙이는 거 많이 봤다. 그런데 'interesting'을 무조건 '흥미로운'이라고 바로 옮기는 건 어휘 실력의 문제이기도 하다. 문맥에 따라서는 '중요한', '비상한' 등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 형용사를 아예 안 쓸 수 있으면 더 좋겠지만.
Commented by  깨  at 2009/11/06 14:13
수업 시간에 받은 작성지침의 원문은 <"우리 사회" 혹은 "현대 세계"와 같은 모호한 용어들을 피하라. 이러한 용어는 너무 막연해서 무의미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연구하고 싶은 것이 "사회"의 무엇에 관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밝혀라.> 그리고 <논평은 전체적으로 볼 때 주장과 관련되어야 한다. 위의 예가 보여주듯이, "흥미로운" 혹은 "독특한" 과 같은 모호한 형용사들은 거의 쓸모가 없는데, 그것들이 그다지 정보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흥미롭다"고 서술하는 대신에, 어떤 것이 나의 주장이나 주제를 "흥미롭게" 만드는지 설명하라.>

아, 듣고보니 흥미롭다, 라는 것도 일종의 '번역투'일 수도 있겠네요. 저도 부지불식간에 자주 쓰는데 이런 사사로운 포스팅에서는 몰라도 학술적인 글에서는 자제하거나 정말 더 구체화시켜야 할 듯. 그리고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형용사의 매력(겉멋)을 떨쳐내는 것도 참 쉬운 일이 아닐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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