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잠과 파리의 연인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밥을 먹고 침대에 눕는다. 어라? 하는 사이에 잠이 든다. 불을 꺼야 하는데, 불을 꺼야 하는데 자꾸 생각난다. 벌떡 일어나 불을 끈다. 술값에 비하면 한줌일 전기료인데, 나는 쓸데없이 환히 켜진 전구를 절대 용납하지 못한다. 그리고서 나는 절약이 몸에 벤 사람이라 말한다. 스키장을 통째로 빌리고 비싼 양주를 물먹듯 먹어도 경영 합리화라며 노동자들을 자르는 재벌 총수가 꼭 이런 모습일까. 그들은 부러진 안경다리나 몇십년 입은 양복을 들먹이며 몸에 벤 검소한 습관 따위의 말들을 내뱉곤 하니까.


불을 끄니 잠이 더 잘온다. 낮잠은 항상 처연한 느낌을 남긴다. 최초의 기억 이야기가 떠오른다. 최초의 기억은 아니지만 누군가 유년 시절의 가장 강렬한 느낌을 말해보라 한다면 낮잠에서 깨어난 뒤라 말할 것이다. 버전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해질녘, 또 하나는 해가 진 후. 해가 질 무렵 낮잠에서 깨어나면 엄마는 밭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벽으로 바싹 붙어 장롱의 문양에 손가락을 얹고 따라 그린다. 나이도 먹을만큼 먹어 잠에서 깨어 아무도 없다고 울 수도 없다. 엄마가 돌아오기 전 까지 혼자 버텨야 한다. 지나고보니 어쩌면 그것이 어른이 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한강도 그랬을까. 한강의 「해질녘에 개들은 어떤 기분일까」를 처음 읽던 날, 나는 생각했다. 한강도 어쩌면 나와 비슷한 경험을 했던 건 아닐까 하고. 그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어린 아이들인건 다 이유가 있다.


해가 진 후의 시간은 종잡을 수가 없다. 밤인지, 새벽인지 알 수가 없다. 오늘인지 내일인지 또한 알 수 없다. 창 밖은 눈동자 같이 검다. 일어나면 엄마가 활짝 웃으며 안아준다. 나는 묻는다. 내일이야? 아니, 밤이야. 그러면 불과 서너시간 밖에 자지 않았는데 그날 하루의 잠을 다 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분명 잠이 오지 않았을 그 밤들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일어나 습관적으로 티비를 켜고 채널을 돌리는데 파리의 연인을 한다. 이 드라마는 몇 번을 봐도 일단 시선이 꽃히면 채널을 돌릴 수 없다. 좋은 드라마는 아니다.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너무 많고 때때로 나도 고개를 돌린다. 그럼에도 내가 이 드라마를 계속 보게 되는 건 이동건 때문이다. 이동건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뛴다. 나 왜이러지? 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브라운관 속으로 빠져든다. 드라마를 보는 시간의 8할은 왜 강태영이 이동건을 선택하지 않고 한기주를 선택했는지 그녀를 원망하는 시간에 쓰인다.


어느덧 12월이다. 도시락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을 잔뜩 다운 받았다.

by  깨  | 2007/12/03 22:41 | 깨's Story | 트랙백 | 덧글(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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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바스티스 at 2007/12/03 23:26
설마......이동건을 보면서 금단의 미트ㅅ...........하악하악
Commented by erasehead at 2007/12/04 05:09
이동건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뛴다.
의미심장한 문장입니다.^^
Commented by  깨  at 2007/12/04 18:37
바스티스 & erasehead_ 그냥 남자인 제가 봐도 가슴 떨릴 정도로 멋있다는 표현이라고만(!) 생각해주세요.ㅋㅋㅋ
Commented by bubble at 2007/12/07 11:51
드라마에선 꼭 한기주 같은 사람을 선택하지만, 실제 현실에선 이동건 같은 사람이 훤씬 백만배 더 좋은데^^ 고전적인 터프함은 이제 한 물 갔지~ㅋ
Commented by  깨  at 2007/12/07 13:15
bubble_ 한기주는 고전적인 터프함도 있지만...무엇보다 돈이!!! 근데 한기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던지는 몇마디도 가끔 제 마음을 설레게 해요...
Commented by at 2007/12/08 02:53
참, 대선관련글은 없어요.? 생각이 매우 궁금.ㅠㅠ
Commented by  깨  at 2007/12/09 14:22
헌_ 하도 재미 없어 별 관심 갖지 않고 있습니다..;; 그냥 무조권 권영길 찍어야 겠다는 생각 말고는 별 생각 없어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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