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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며 울음을 참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하종강이 보여준 것은 순수한 분노였다. 인간이 세계에 대해 순수한 분노를 품는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리고 그 분노에 감응하는 경험이 한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그 때 알았다.
새삼 분노를 잃고, 적은 자를 따르기보다는 많은 무리 속에 끼고 싶은 유혹으로 충만한 날에 하종강 선생님의 이 글을 읽었다. 맥주는 딱 한 잔 밖에 마시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진정성의 시대가 종말을 고했다고? 나는 그럼 이 시대에 종말을 고하련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렌트의 '누구(who)'와 '무엇(what)'의 구별을 파악해둘 필요가 있다. '무엇'은, 예를 들면 남성인가, 중년인가, 부친인가, 공무원인가.....하는 방식으로 그려지는 어떤 사람의 '정체성'이다. 이러한 '속성' 혹은 '사회적 지위' (뒤에 나올 '사회적인 것'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개인을 언제나 사회구조 내의 그들의 지위와 동일시하는" 것에 있다. <<인간의 조건>>, p.93) 등으로 묘사될 때, 그 사람은 타인과 공약 가능한 위상에 놓여 있다. 어떤 사람은 '무엇'이라는 위상과 관련되는 한 타인들과 교환 가능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상의 공간 안에 살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대부분의 경우 '무엇'으로서 처우하는 공간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공간을 '현상의 공간'과 대비하여 '표상의 공간(the space of representation)'이라고 부르자. '표상'은 타자의 행위나 논의를 '무엇'이라는 위상, 즉 타인과 공약 가능한 위상, 교체 가능한 위상으로 환원하는 시선이다. 표상의 시선으로 보는 한, 나는 타자 앞에 '나타나는' 것이 불가능하다. 표상이 지배하는 정도만큼 '현상' 가능성은 봉쇄되는 것이다.
일본인이라는 표상, 아이누라는 표상, 여성이라는 표상, 장애인이라는 표상, 노인이라는 표상, 동성애자라는 표상, 노숙자라는 표상...표상을 가지고 타자를 바라보는 것, 혹은 표상을 통해 타자에게 보여지는 것은 우리에게도 지극히 일상적인 경험이다. 게다가 표상의 시선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신체적으로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열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과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략)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표상의 폭력을 항상 어느 정도는 가지고 산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만나는 타자를 늘 어떤 방식으로든 표상하고 있으며, 이 '표상의 공간' 바깥으로 완전하게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중략) 어떤 타자가 우리 앞에 '누구'로서 나타나는 것은, 우리가 그 타자에 대해서 하고 있는 예측이 엇나가고 우리의 '표상의 공간'에 균열이 생길 때이다. 타자에 대한 완전한 예측을 포기하는 것이 '현상의 공간'을 생기게 하는 조건이다. 예측한다는 것은 미리 결정한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미리 결정해버리지 않는 것이, 타자가 '누구'로서 나타나기 위한 조건, 즉 타자의 자유의 조건인 것이다. (중략) '현상의 공간'은 타자를 유용성 여부로 판단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어떤 필요의 유무로 타자를 판단하는 공간도 아니다. '현상의 공간'은 타자를 하나의 '시작'으로 여기는 공간, 다른 조건을 전혀 상관하지 않고 타자를 자유로운 존재자로 처우하는 공간이다. 타자를 자유로운 존재자로 처우한다는 것은 타자를 비-결정의 위상에 두는 태도, 예기치 않았던 것을 기다리는 태도를 요구한다. 사토이 준이치, <<민주적 공공성>> 중. 아렌트가 행한 '누구'와 '무엇'의 구별이 흥미롭다. 공약 가능한 정체성에 맞세우는 공약 불가능한 특이성의 존재는 충분히 존중받을만한 이유가 있다. 표상과 대비되는 현상의 공간 역시 우리가 바로 우리 곁에 만들어야 할 장소이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말했듯 표상은 권력에 의한 자발적 범주화를 야기하는 핵심적 메커니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구'와 '무엇'의 맞세움, '표상'과 '현상'의 맞세움을 현실에 바로 적용하는 순간 문제가 발생한다. 그것은 '연대의 근거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과 맞닿아 있다. 가령 민족과 계급은 근대를 대표하는 표상이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이 표상은 분명 어떤 연대를 가능케 했다. 예컨대 노동자라는 표상은 권력에 의해 규정된 부정적 표상인 동시에 그 부정적 표상을 전복한 바로 그 위치에서 사회적 연대를 이끌어낼 수 있는 긍정적 자기 정체성의 표현이기도 하다. 자신이 노동자라는 것을 깨달을 때, 그리고 내 옆과 앞과 뒤에 선 이들이 같은 노동자라는 위치를 공유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연대는 가능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공약 가능성은 전체화의 위험과 연대의 씨앗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다. 물론 이 연대는 지극히 '근대적인' 방식의 연대이며 이러한 형식의 연대가 모든 연대의 현실적 양태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인용한 글에서는 '현상의 공간'에서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존재와 존재 사이의 연대가 가능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것은 바로 타자에 대한 완전한 예측을 포기하고 타자를 비-결정의 위상에 두는 태도를 지니는 것이다. 어찌보면 아름답기까지 한 이러한 주장은 그러나 곧바로 인식론적 문제를 야기한다. 과연 사물(존재)에 대한 선입견 없이 인식하는 것이 가능할까? 나는 선입견은 인간의 생존과 결부된 진화적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세계는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으며 이 불확실성은 공포를 생산해낸다. 우리는 이 불확실성이 주는 공포와 위협을 줄이는 방식으로 진화홰왔다고도 할 수 있다. 그 중 하나는 상대(사물을 포함하는)에 대한 예측이다. 이는 그것의 정합성과 상관없이 주체의 공포를 줄여주며 이를 통해 비로소 접근과 관계를 가능케 한다. 이러한 선입견이 옳은가 그른가는 다른 문제이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만약 타자가 비-결정의 위상에 위치하게 된다면 우리는 아마 그에게 손을 내밀 수 없으리라는 점이다. (만약 모든 인류가 서로에 대한 완전한 예측을 포기하고 서로의 자유의 조건을 보장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우리는 현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표상이 지배하는 정도만큼 '현상' 가능성이 봉쇄된다는 주장은 인상깊었다. 과연 이 둘이 제로섬 관계인가? 되물어봤지만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표상에 의한 정체성이 그 존재를 삼켜버린 사람과의 대화는 무미건조할 뿐 아니라 갑갑하다. 가령 입만 열면 (진심으로) 조국과 민족의 미래를 염려하는 정치인이나 운동 이외의 주제와 삶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 활동가를 떠올려보라. 이러한 존재와는 결국 비즈니스적인 관계 외에는 맺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표상과 현상의 구별은 문학의 자리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따지고 보면 문학이야말로 표상의 균열에서 생성되는 현상을 포착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소이지 않은가.
진실 보도를 갈망하는 순수한 정치적 열망과 접근 불가능한 권력의 치부를 은밀히 훔쳐보고 싶은 음란한 관음증은 현실에서 얼마나 선명하게 구별되는가. 어쩌면 앞에 말한 순수한 정치적 열망 같은 것은 기껏해야 언론학에서 칸트적 규제이념으로나 기능할 뿐이지 않을까. (물론 나는 규제이념의 중요성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편이다.) 현실에서 이 둘은 혼재되어 있다. 왜 뜬금없이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진중권이 나꼼수에 대해 '포르노'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민감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진중권이 나꼼수에 대해 포르노라고 비난하기 훨씬 이전부터 나꼼수의 흥행비결은 대중들의 관음증적 호기심과 정확히 공명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왔다. 진실 보도를 갈망하는 순수한 정치적 열망과 권력의 치부를 들여다보고 싶은 음란한 관음증이 현실에서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입장에 섰던 나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히 나꼼수의 흥행 비결에 대한 객관적이고 기계적인 설명을 넘어 가치판단의 영역으로 진입하게 되면 문제는 달라진다. 이때는 나꼼수와 포르노가 공유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한 정밀한 분석이 요구되는 것이다. 사실 이명박이 개고기를 인분수대로 시키지 않는다거나 유인촌이 요정 업계의 미래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 위해 성급히 차를 돌려 돌아왔다는 식의 이야기는 일개 가쉽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단지 가쉽으로 끝나지 않는 것은 그것이 대한민국 권력층의 지배적인 문화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요정에 대한 이야기들이 그렇다.) 나꼼수를 들으면 검찰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 그런 이런 이야기들은 이른바 정론지에서 대놓고 할 성질의 이야기가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으로는 대한민국의 막강한 권력이 검찰의 숨은 면모를 갖은 비웃음과 함께 즐길 수 있다. 이때 대중들이 느끼는 쾌감은 올바른 사회를 향한 정의 구현에서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은밀한 권력의 치부를 훔쳐보는 데서 오는 것인가? 거듭 말하지만 이런 질문은 하등 중요치 않다. 나꼼수와 포르노가 공유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훔쳐보기'이다. 이 둘을 접하는 대중들에게 음란한 관음증의 혐의를 씌울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꼼수와 포르노 사이에는 심대한 차이점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포르노는 기본적으로 환타지를 근거로 하고 있는 반면에 나꼼수는 실재가 실은 환타지일 수 있음을 폭로한다. 가령 우리는 한 국가의 대통령이 어떠어떠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들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것을 너무나 당연한 상식 내지는 실재로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가 대통령에 대해 갖고 있는 이런저런 요구와 기대와 상식이 실은 환타지에 불과한 것이라면? 기대와 상식이라는 실재를 배반한 환타지가 실은 우리 사회의 실재라면? 나꼼수가 겨냥하는 지점은 바로 여기이다. 실재와 환타지의 배치를 역전시키는 것. 우리는 이를 통해 역설을 통해서만 실재를 마주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좌파진영에서 보면 나꼼수는 이를 데없이 불편한 존재이며 그 자체가 또 다른 환타지를 생산해내는 장치로 보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딱 하나이다. 직접 만들어서 해보라는 것. 물론 나는 해도 안될 거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왜냐면 나꼼수는 단순한 조롱과 풍자 방송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엔 간단치 않은 정보력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는 어쩔수 없이 집권해본 경험이 있는 쪽을 당해낼 수 없다. 가령 최근 문재인, 박지원, 이정희가 함께 방송에 나왔을 때 이정희가 허수아비가 된 것만 봐도 여실히 드러난다. 내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이런 말을 하는 건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좌파들은 대중들을 이해할 마음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꼼수의 환타지와 이데올로기성을 비판하는 데만 몰두하지 왜 그 많은 대중들이 나꼼수에 열광하는지 제대로 분석할 마음이 없다. (혹은 능력이 없다.)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집권을 염두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안타까울 것도 없겠지만 말이다.
별 다른 일도 없는데 왜 이렇게 찝찝하지? 마치 무언가 대단한 실패를 겪은 듯한 기분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잔뜩 부푼 풍선에 바늘이라도 꽂은 듯 온 정신이 줄줄 새어 나갔다. 불안한 예감이 든다. 온 몸에 힘이 빠진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 같다. 세상은 내가 아는 세상이 아니고 그래서 그 흔들리는 세상에 내리꽂은 목표마저 그림자처럼 느껴진다. 해가 지면 오간데 없이 사라지고 모두 어둠뿐일 것이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세상의 전부인것처럼 알고 지낸 그림자는 그러나 해가 지면 무엇으로 기억될 것인가. 모든 의욕이 사라져버린 날이다. 그런데 오늘 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오늘 무얼 보고 무엇을 확인한거지? 근본적인 무관심, 근본적인 겉치레. 사람들은 서로에게 도대체 무엇일까. 공동체는 空洞體다. 수없이 불러본 이념이지만 나는 솔직히 지탱할 자신이 없다. 이상한 의욕상실의 밤이다. 죽음 이후처럼 낯설다.
학교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학교는 텅 비어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냥 추웠다. 햇볕이 들지 않는 연구실은 건조하고 스산했다. 냉기가 니트를 뚫고 들어왔다. 촘촘하다는 것은 틈이 있다는 말이다. 촘촘하게 짠 니트를 입고 나는 추위에 떨었다. 건조하면 정신이 들뜨게 된다. 그래서 나는 자기 전에 수건을 한 장 적셔 베개에 올려 둔다. 수건의 물기가 조금씩 마르면서 방의 건조함을 잡아먹는 상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데 건조함이라는 건 무슨 상태를 뜻할까. 더 적은 습기인가 더 많은 건기인가.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를 열고 물을 마셨다. 냉장고 왼편에 모기 한 마리가 붙어 있었다. 두툼하게 배가 나온걸로 보아 어제 내 귓가에서 앵앵 거리며 울던 녀석들 중 하나였다. 탁하고 치니 맑은 선홍색 피가 손에 번졌다. 우리는 그래도 피를 나눈 사이가 아닌가. 죽은 모기가 머리 위에 고리를 하나 달고서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뇌까렸다. 야 닥치고 꺼져. 그러자 모기는 입을 다물었다. 배가 고프다. 이따 저녁에 오랜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시기로 했다. 이 문장의 중의적이다. 나는 오랜만에 술을 마시는 걸 수도 있고 나는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 술을 마시는 걸 수도 있다. 문장의 중의적이지만 나를 아는 사람은 결코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문장이다. 나는 월요일에 술을 마셨다. 화요일에 술을 마셨다. 수요일엔 마시지 않았다. 목요일에 술을 마셨다. 오늘도 마신다. 없이는 못산다. 대략 이런 것들이 두어개 쯤 된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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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적으로 공감합니다...by 초록물고기 at 04/09 연락하겠습니다. ㅎㅎ by 깨 at 10/12 우와 정말? 다시래기를 .. by 깨 at 10/04 이런 포스팅 많았으면 .. by 종이 at 10/03 용두사미라서 아쉬웠음... by 깨 at 09/12 오우. 보기만 해도 건강.. by 깨 at 09/05 오 아직 안 읽었는데 이 .. by 종이 at 09/04 난 세상에서 밥 먹는게 .. by 종이 at 09/04 요새 홈쇼핑에서 파는 .. by 깨 at 09/01 훈제오리가 기다리고 있.. by James at 08/31 꼭 한번 들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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