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경은, 가슬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 동문 쪽에 있는 양식당이었는데 밤에는 주로 와인을 팔고 점심에는 파스타와 리조또, 피자 등을 파는 곳이었다. 까르보나라와 토마토 해물 리조또, 고르곤졸라를 먹었다. 세트 메뉴에 와인도 포함되어 있어 대낮이지만 가볍게 한 잔 했다. 파스타와 피자에 곁들여서 조금씩 마시니 맥주잔에 잔뜩 부어 원샷하던 그 맛과는 사뭇 다른 맛이 났다. 이래서 술은 분위기다. 설사 내가 집에서 그렇게 마셨던 와인이 오늘 점심에 마셨던 그 와인보다 훨씬 비싼 와인이라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많은 이야기를 하고 웃었다. 후식으로는 그 옆에 있는 타르트 가게에 가서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 그러나 꽤나 달콤했던 타르트와 차가운 아메리카노 커피를 마셨다. 대학원에 합격했다. 총 네 명을 뽑는데 스물 다섯명 정도가 지원했다고 한다. 나도 10학번이다. 다시 새내기가 된다는 게 어색하기도 하지만 설레인다. 얼른 이 지겨운 학부를 졸업하고 풋풋한 새내기로 산뜻한 생활을 하고 싶다. 풋풋과 산뜻. 내가 써놓고도 나랑 안어울려. 우웩. 


일주일 째 먹는 반찬이 똑같다. 지하철에서 평생 바나나 우유만 먹고 산 할아버지를 본 적이 있다. 그 분은 그 공로를 인정 받아 빙그레로부터 감사패까지 받았다고 한다. 나도 계속 이러다간 아무래도 비엔나 명예 시민장을 수여받게 될 지 싶다.


그런데 혼자 마시는 맥주는 왜 이리도 쉽게 배부를까. 
by  깨  | 2009/11/26 21:44 | 깨's Story | 트랙백 | 덧글(2)
포기
다가오는 것들을 품지 않고도 새벽이면 습관적으로 울던 닭들은 죽어 어디선가 들어본 리듬에 몸을 흔들던 사람들은 잃어 사라진 것들은 슬픔도 기쁨도 없는 곳에서 노래를 부른다는데 그 노래를 듣는 알은 몸을 떨어 어제도 달걀 하나를 먹었다 예전에는 뜰 앞에서 쉽게 줍던 것들인데 과거에는 쉽게 내 손을 타던 것들인데 지금은 손을 뻗어도 될까요 물어도 만져지는 것은 쉽게 덥혀지지 않는 육체들 너무 많은 말을 해야 했던 일은 끝났고 예비하지 않은 일들은 날카로운 치아를 드러내는 새벽 도무지 잘 살고 있다는 덤덤함이 가당치 않은 오전 같잖은 포즈 따위야 포기한 지 오래다 당신의 심오한 포즈를 해석하느니 차라리 술취한 개의 뒷다리에 묻어 몸을 떨겠다.
by  깨  | 2009/11/21 01:43 | SentimenticS | 트랙백 | 덧글(0)
일기
*


2박 3일의 제주도 여행을 끝마치신 부모님이 오늘 돌아오셨다. 어제 점심 시간에 전화를 드리니 한라산에 올랐는데 눈꽃이 너무 예쁘다며 탄성을 지르셨다. 뭐야. 나는 일하러 가는데 엄마 아빠만 그렇게 좋은 구경하니까 좋아! 너도 젊은 날 열심히 일해서 나중에 우리처럼 이렇게 여유 있게 살아. 가슴이 뜨끔했다. 젊은 날 열심히 일하는 건 자신 있는데 '우리'를 만드는 일은 여전히 쉽지 않아 보인다. 아들우리서울도착했다언제시간내서집에한번오렴맛있는것해줄게. 한창 일하고 있던 저녁 무렵에 아빠에게 문자가 왔다. 전에 나와 살 땐 안그랬는데 여기 있으니 진짜 엄마 아빠가 보고싶다. 헉. 나 변한건가? 뭐가?


 
*


오늘도 맥주 한 잔. 실은 소주가 마시고 싶었으나 이 시간에 누구 불러내서 마실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고 텅 빈 집에 혼자 앉아 소주를 마시기도 좀 그렇다. 나타샤가 있으면 물론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내게는 떠올릴 나타샤가 없다. 내가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시며 누군가를 떠올린다면 그녀에게 제주로 떠나자고 말할 것이다. 제주로 가는 건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라고, 세상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거라고. 나도 믿지 않을 체념과 거짓말에 속을 사람은 없겠지만 못이기는 척 속아주는 사람이 그립다. 네가 아는 걸 내가 모르는게 아닌데 부릅뜨고 정색한들 뭐가 달라지겠는가.



*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내가 떠올렸던 사람을 기록하기로 마음먹었다. 하루에 내가 떠올리는 사람은 어림잡아도 스무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을 적어보고 싶다. 궁금하다. 그 목록에 기재된 사람들도 하루에 한번쯤은 나를 생각할까? 



*


어젯 밤 침대에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내가 요즘 느끼는 당혹스러움은 한 번도 생각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생각들을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낯선 생각들이 이불 속을 파고드는 차가운 손 같이 나를 깜짝깜짝 놀래키고 움츠려들게 만든다. 어쩜 나는 이런 생각을 하리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걸까. 
by  깨  | 2009/11/18 01:01 | 깨's Story | 트랙백 | 덧글(2)
새벽
다섯 시간 넘게 말을 쏟아내고도 말이 고프다. 대화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어떤 말은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자신을 소외시키고 어떤 말은 내 귀에 닿는 순간 나를 소외시킨다. 내 자리라는 것에 대해 또 생각한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을 만나기엔 적당하지 않은 늦은 밤인데 이제는 세월이 시계 같아 날이 갈 수록 밤은 깊어만 간다는 느낌이다. 밤이 깊다는 건 새벽이 온다는 신호라는 데 내 새벽은 어디쯤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게는 사전에 기록된 아버지가 없고 어머니의 젖맛을 기억하기 위해 부지런히 손을 놀린다는 구절을 어디엔가 적어 두었다. 스물 여섯은 참 가진 게 없는 나이지만 일찍 이루고자 마음 먹었다면 무언가는 달라졌을까. 돌이켜 스물 여섯해를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뒤늦게 찾아온 해갈을 풀기 위해 마실 물이 아직은 부족하다. 나에게는 다른 길이 있을 뿐이고 그 길 위의 한 이정표를 보기까지 나는 여전히 가진 게 없을 것이다. 가난에 대해 생각하지만 이는 모든 경험의 결핍에 대한 변장술일 뿐이다. 하물며 외로움 따위야. 
by  깨  | 2009/11/17 02:00 | 트랙백 | 덧글(4)
새벽
요즘은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한다. 그래도 본마음을 말하자면 저녁 굶고 일하는 나보다 엊그제 수능 끝났는데 끝나자 마자 학원에 와 논술 시험 준비 하는 애들이 더 딱하다. 아니 딱하다기 보다는 대단하다는 느낌? 아니 대단하다기 보다는 뭔가 낯설다는 느낌? 난 수능 끝나고 뭐했더라? 애들 다 집으로 돌아간 기숙사에서 푹 잤구나. 맞아. 인물과 사상을 1권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했던 때도 바로 그 때였지. 그리고 저녁 시간엔 공부하는 후배들 피해서 몰래 TV로 농구를 봤구나. 기억도 가물가물한 그 때 그 시절이다.


신촌역에 도착하니 열두시가 거의 다 되어 있었다. 치킨이 먹고 싶어 KFC에 갔다. 오리지널 치킨을 달라고 하니 야간에는 팔지 않는다고 했다. 서운해서 기운이 쪽 빠져버렸다. 할 수 없지. 그럼 핫크리스피 치킨 주세요. 네 조각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은 무척 추웠고 역시나 장갑과 목도리가 아쉬웠다. 시간 나면 꼭 예쁘고 따뜻한 걸로 사리라 다짐했다. 집에 돌아와 냉장고에 넣어둔 맥주를 꺼내고 아프리카를 틀었다. 냉장고 속 맥주도 바닥을 드러내간다. 이 맥주는 이사할 때 아빠가 챙겨준 건데 - 아들 좋아하는 거라고 집에서 맥주까지 한 박스 사서 챙겨주는 아빠의 마음이란 ♡ - 조만간 내가 마트에 가서 또 채워놓아야 할 듯 싶다. 

 
혼자 밥 먹는 건 아무렇지도 않지만 적막과 함께 밥 먹는 건 도무지 못할 짓이다. 아프리카를 틀자 엠비씨 스페셜 추신수편이 나왔다. 나도 막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봤다. 그리고 다짐했다. 스스로에게 어리광 따위는 부리지 않겠다고. 내가 공부하랴, 생활비 마련하랴, 등록금 마련하랴, 힘들다 하더라도 추신수보다 더 힘들겠어? 그 무엇이든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은 절대 현실에 대고 나약한 투정 따윈 하지 않는 법이다. 문태준의 시 중에 '혼동이라는 그 말로 나를 너무 내세웠다.' 라는 구절이 있다. 나 또한 여러가지 말들로 나를 내세웠다. (이 단어는 중의적이다.) 한동안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야 할지 잊고 살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에 대해 쓸데없는 비웃음을 남기곤 했다. 하지만 그 생각들로 나를 너무 내세웠다. 어떤 마음가짐이어야 할 지 알 듯 싶지만 지니면 행해야 하는지라 차마 지니기 힘들달까. 


새벽이다. 윤치호에 대한 레포트를 방금 끝냈다. 
by  깨  | 2009/11/15 02:21 | 깨's Story | 트랙백 | 덧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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